음악 공유는 유일하게 가장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음악 팬덤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100년 전에는 축음기판이 음악 공유 수단이었다. 오늘날에는 스포티파이, 애플뮤직, 유튜브 등 무엇이든 플레이리스트로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20년 전까지는 믹스테이프를 음원 공유 수단으로 사용했다. 일부 음악 팬은 믹스테이프는 친구나 연인을 위한 다양한 음악을 모은 CD나 카세트를 손수 제작했다. 힙합 세계에서는 믹스테이프가 아티스트의 새로운 비트 발견, 외부 노출, 음반 공유 등을 위한 기본적인 요소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믹스테이프가 카세트에서 .zip 파일, 사운드클라우드로 바뀌면서 믹스테이프는 음악의 50년 역사와 미래의 기본적인 요소로 남았다.
믹스테이프가 등장한 때는 1970년대와 힙합 장르 형성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세트는 누구나 음악에 접근할 수 있는 최초의 진정한 휴대용 음악 수단이었다. 믹스테이프 자체는 1963년에 제작되었으나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는 카세트가 가장 인기 있는 음악 청취 방식이었다. 음질과 녹음 기능, 휴대성 모두 1979년 등장한 워크맨 덕분에 개선돼, 최초로 음악이 진정한 이동성을 갖추고 카세트가 최초의 기본 믹스테이프 형태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믹스테이프는 DJ와 MC의 공연 실시간 녹음 수단이었다. 턴테이블로 연주하는 이들은 기존 비트를 혼합하면서 래퍼는 비트에 맞추어 프리스타일 랩을 선보인다. 음악 팬이나 아티스트 모두 믹스테이프 사본을 제작하여 공유한다. 주요 음반사가 제작한 것이 아니므로 믹스테이프 샘플 대부분 음질이 뛰어나지 않고, 제작된 도시 이외 지역으로는 널리 배포되지 않는다.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지역 음반 매장인 크레이지 리듬스(Crazy Rhythms) 공동 대표인 잭 베이커(Zach Baker)는 “믹스테이프는 대중의 음악 형태이다. 필요에 따라 탄생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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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사이에서 믹스테이프가 필요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래퍼와 소속 계약을 체결한 음반사는 극소수였다. 따라서 믹스테이프는 래퍼가 잠재적인 팬과의 음원 공유 수단, 그리고 더 나아가 메시지 전달 수단이 되었다. 텍사스대학교 오스틴캠퍼스 음악학 교수 찰스 카슨(Charles Carson)은 당시 믹스테이프는 동네 이발소와 트렁크 판매점에서 판매하는 평범한 시민의 지역사회 기반 음원 공유 수단이었다고 설명했다. 카슨 교수는 “믹스테이프 문화의 핵심은 접근성이었으며, 제 의견을 말하는 것을 의미했다. 보통 접근할 수 없는 일부 맥락에서 의견을 전달하는 것과 같았다. 지역사회와 지역사회의 가치관을 이야기하고, 지지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힙합이 주류 음악 장르가 되면서 믹스테이프도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손수 제작하는 형태는 아티스트의 진정성이라는 징조 중 하나였다. MC 해머와 같은 아티스트가 상업 음반 시장에서 널리 인기를 얻자 많은 이들이 믹스테이프를 길거리 음악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믹스테이프의 인기 음악 비트 사용은 당시 MC 인지도가 높지 않더라도 음악 자체는 인지한다는 의미였다. 일례로, 50센트는 기존 수단을 두고 랩을 하면서 음반 제작 방식 전체를 구성해, 기본적으로 믹스테이프 형태로 앨범을 제작하여 믹스테이프 혁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텍사스대학교 샌안토니오 캠퍼스 민족, 문화적 성, 생물학적 성 및 멕시칸 음악 연구 부교수인 마르코 세르반테스(Marco Cervantes) 부교수는 “타인의 수단을 채택하고 전환하고는 그에 따라 자유롭게 랩을 하면서도 세련된 품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멋지다”라고 말했다. 세르반테스 부교수는 멕시칸 스텝 그랜드파더(Mexican Step Grandfather)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힙합 아티스트이자 힙합 그룹 서드 루트(Third Root) 멤버이기도 하다. 세르반테스 부교수는 “힙합 아티스트가 기존 비트 종류에 접근할 방식을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같은 아티스트로서 같은 수준에 있다고 느낄 수 있다”라고 전했다.
믹스테이프가 아날로그 카세트에서 디지털 다운로드 파일로 바뀌면서 많은 아티스트가 거액 계약을 체결해도 계속 무료로 믹스테이프를 제작했다. 유명 힙합 아티스트인 릴 웨인은 주요 음반 발매 시점 간 믹스테이프를 발매했다. ‘Sorry 4 the Wait’은 2011년 ‘Tha Carter IV’ 발매 전까지 많은 팬의 주목을 받은 믹스테이프이다.
그러나 아티스트의 샘플 사용 저작권이 음반사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법률 집행으로 이어졌다. 2007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릴 웨인과 자주 협력한 아티스트 DJ 드라마(DJ Drama)의 애틀랜타 본사를 급습한 뒤 8만 개가 넘는 믹스테이프를 압수했다. 디지털 시대의 믹스테이프 위치가 확고히 자리 잡으면서 다트피프(Datpiff)와 같은 웹사이트가 믹스테이프를 무료로 유지하는 데 기본적인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음반 산업이 주목을 받았다.
카슨 교수는 “음악 산업이 믹스테이프를 수익화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믹스테이프 제작 의도와 목적을 의미하며, 믹스테이프 제작 시 손실을 기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믹스테이프 문화의 순수 효과가 이익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불법 복제 음원으로 음악을 듣고 아티스트를 표절한다. 그러므로 주요 음반사에서 데뷔하지 않는다면, 앨범 구매 시 아티스트의 앨범이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라고 설명했다. 카슨 교수의 설명을 입증하고자 하는가? 2009년, 세 번째 믹스테이프인 ‘So Far Gone’을 발매하고, 이듬해 주요 음반사에서 ‘Thank Me Later’ 미국 시장 데뷔 5주 만에 앨범 100만 장을 판매한 가수 드레이크의 사례를 보아라. 이후 ‘Thank Me Later’는 트리플 플래티넘을 달성했다.
오늘날 믹스테이프는 변경 과정을 거쳤다. 한때 비어 있는 음원 목록을 직접 휘갈겨 쓰면서 손수 제작한 카세트가 음악 산업에서 진지하게 발매를 고려하는 대상이 되었다. 주류 힙합 아티스트가 제작한 믹스테이프는 정규 앨범과 비슷한 수준의 완성도를 갖춘 채로 공식 발매돼, 기본적으로 정규 앨범과 믹스테이프 간 경계가 모호해졌다. 카슨 교수는 “DJ의 역할은 보통 프로듀서의 역할이었으나 발전하면서 기본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제 No I.D.와 팀버랜드와 같은 아티스트를 믹스테이프 DJ 선구자보다 더 따른다”라고 말했다.
믹스테이프의 특징이 진화했으나 지금도 아티스트 탄생이라는 기본적인 역할을 한다. 밴드캠프, 사운드클라우드와 같은 웹사이트는 신인 래퍼가 이름을 알릴 수단이 되었다. SNS는 신인 래퍼가 주목받을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예를 들어, 플리아나 보스(Flyana Boss)는 2023년 여름, 틱톡에서 ‘You Wish’라는 곡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승승장구하는 밀워키 무대에서 활동하는 래퍼에게는 틱톡이 중요한 수단이다. 래퍼가 인지도를 얻는다면, 해당 래퍼의 음반도 인지도를 얻는다. 밀워키 무대에서 활동하던 아티스트 세 명이 발매한 믹스테이프가 2023년 최고의 믹스테이프로 선정되었다.
세르반테스 부교수는 “오늘날 믹스테이프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카세트를 떠올릴 필요가 없다. 카세트는 믹스테이프를 포함하는 하위 범주 언어의 일부분이 되었다. 믹스테이프는 시급함과 세련됨은 적은 에너지를 전달하며, 앨범과 함께 다른 경로로 음원을 전달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레코드판이 부활하면서 카세트 판매량이 증가하는 가운데, 옛 믹스테이프도 대중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 위 기사는 와이어드US(WIRED.com)에 게재된 것을 와이어드코리아(WIRED.kr)가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 : 고다솔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