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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믿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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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믿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과 집단 모두 종종 고통을 무시받고는 한다. 일레인 스캐리의 공리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By VIRGINIA HEFFERNAN, WIRED US

코로나 시대 마스크 착용에 대한 견해부터 코로나 시대 의무 조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항을 아우르는 타인에 대한 적대적 의심은 2020년 코로나19 시작이라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이 시작할 때부터 드러났다. 이제는 가장 공격적인 형태로 드러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의구심은 코로나19 1차 대유행 이후 생존한 환자 1/3에 해당하는 코로나19 장기 환자를 향하고 있다. 한 가지 이론은 코로나19 감염이 신체 방어 체계 충돌을 일으키면서 면역 체계가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 되면서 호흡 곤란과 극심한 통증, 머리가 무거운 느낌을 주는 브레인 포그(brain fog)를 유발한다. 메간 오루케(Meghan O'Rourke)는 곧 출간될 만성 통증을 다룬 『보이지 않는 왕국(The Invisible Kingdom)』을 통해 코로나19 장기 환자의 증상을 의미 없는 증상으로 치부한다고 자세히 설명한다. 음성 판정을 받은 코로나19 장기 환자를 대상으로 한 의학 실험과 함께 장기 코로나19를 연구한 전문의 데이나 맥카시(Dayna McCarthy)는 “서양 의학에서는 단순히 아무 이상이 없다고만 말한다”라고 주장했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폴리오 이후 증후군과 섬유근육통 등 만성 질환 관련 회의적 견해는 매우 흔하다. 십중팔구 만성 질환 환자를 소외하면서 고통 악화와 치료 지연이라는 결과가 이어진다. 연구팀이 코로나19 장기 증상을 실제 질병이라고 확실히 나타낼 생체 지표를 찾기 전까지 최고 수준의 실력을 보유한 임상의가 할 수 있는 일은 환자의 증상 설명을 듣고 치료하는 일뿐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장기 증세를 다루려는 노력은 고통이라는 더 엄격한 인식론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즉, 타인의 고통을 믿거나 의심하는 방법을 나타내는 이론을 의미한다.

일레인 스캐리(Elaine Scarry)는 1985년에 출간한 저서 『고통을 겪는 신체: 세계 창조와 미창조(The Body in Pain: The Making and Unmaking of the World)』를 통해 중요한 주장을 펼친다. “심각한 고통을 겪는 것은 확신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듣게 되면, 의심만 한다.” 통증 주장은 고통과 지식을 모두 명확히 설명하며, 여성이 철학적 주장과 함께 이름을 알린 사례는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필자는 뒤늦게나마 스캐리의 주장을 ‘스캐리의 공리(Scarry's axiom)’라고 부른다.

2021년 가을, 필자가 스캐리의 공리를 염두에 두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필자는 코로나19 장기 증상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친구를 지지한다. 또, 필자는 인종차별에 나서는 미디어의 태도를 논의한 포럼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의 경험은 스캐리의 공리를 경험한 두 번째 사례이자 처음 스캐리의 공리를 다원화된 국가에 만연한 불신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처음 설명하고 제시했다.

포럼에서는 어느 한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각자 불만 사항을 설명했다. 사회주의자는 미디어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초점이 ‘절대 끝나지 않는 계급 투쟁’이라는 매우 중요한 다툼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자는 미디어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초점이 개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예술, 자본, 영적 존재에 대한 희망 등 개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성보다는 감정을 더 내세운 공격적인 대학생을 비판하면서 교육과 공존할 수 없는 특성인 평생 이어지는 공격과 안전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어딘가 익숙한 듯한 포럼의 논쟁은 각자 근거가 있다. 필자가 말할 수 있는 한 어느 쪽이든 그 어느 때보다 더 각자의 견해를 고집한다. (그리고, 필자는 포럼에서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견해 모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중요한 사실을 눈앞에서 놓친다. 바로 모두가 타인의 고통을 실제보다 심각하지 않은 문제로 치부하면서 자신과 동료의 고통은 강조한다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다.
 
[사진=Unsplash]
[사진=Unsplash]

스캐리가 저서와 함께 분명히 주장한 바와 같이 의심이라는 역동성은 감정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모두 나타낸다. 다른 부족을 향한 사소한 공격은 그리 나쁘지 않다. 그러나 개인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노력을 향한 극찬과 불평을 늘어놓는 비판적 발언과 칭찬을 없애는 행위는 어떤가? 자유주의자에게는 정당한 고통을 나타낸다. 외로움과 절망감을 두고 불평을 늘어놓는 부유한 테크 업계 관계자는 어떤가? 사회주의자에게는 자격을 지닌 엘리트 계층이 테슬라 주식 손실에 우는 소리를 내면서 노동자 계급이 빚에 허덕이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스캐리의 공리는 경쟁하듯이 내비치는 억압과 어떤 인구 집단이 가장 심각한 고통을 겪는가를 두고 신뢰할 수 없는 언쟁을 벌이는 것 이상을 나타낸다. 특정 유형의 고통을 다른 고통보다 더 정확히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일부 고통은 부인할 수 없으면서 다른 이들이 겪는 고통은 사기로 치부하는 것을 다룬다.

일부 학생이 타인의 고통을 들어주면서 다른 이들은 개인 경험을 공유하려 하는 맹목적이면서 제대로 의도된 공감 형성이 발생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심화된 심리학적 작용인 타인과 공감한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직면한다. 바로 타인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이게도 고통이 끊임없이 극적으로 발생할수록 타인이 고통 수준에 대한 설명을 거짓으로 의심할 확률이 높다. 강요에 대한 불안감이 의심으로 바뀌면서 고통을 겪는 이는 상대방의 성급함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하기보다는 잔혹함이나 가스라이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믿음이 의심으로 변하는 과정은 특히 미국, 혹은 인터넷에서 유독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이다. 신뢰할 수 있는 고통을 단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탓이다.

스캐리는 “고통을 겪고 있다”라는 발언에 만족할 만한 반응 중 그 어떠한 반응도 고통의 정도를 똑같이 반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이와 고통을 반영하고자 하는 이가 다른 이이기 때문이다.) 결국, 고통을 겪는 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고통을 겪는 이는 자신의 문제로 관심을 끌 가장 좋은 방법이 달려들어 물거나 소리치기, 울기, 외면하기 등 다른 이에게 약간의 고통을 가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결국, 한 명은 고통 때문에, 다른 한 명은 공격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된다. 서로 상대의 고통을 의심한다. 상대의 경험은 고통을 완화하지 않고, 고통의 원천이 된다.

미국 의학계와 정치계에도 드러나는 문제이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의 성과가 미국 운동선수 사이의 보편적인 인식과 같은 프로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에서도 비현실적일 정도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인이 공격을 과장하여 표현하면서도 (상대방 모욕과 당혹감 주기, 위협 가하기 등) 전반적으로 온건한 것을 원하기도 한다. 부상을 과장하거나 의도적으로 상대방의 파울을 주장하는 행동을 하는 유럽인의 보편적인 행동을 가치 없는 행위로 치부하고는 한다. 2014년, 에릭 레벤슨(Eric Levenson)이 디 애틀랜틱을 통해 주장한 바와 같이 미국 운동선수는 극심한 신체적 고통과 함께 실패를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실패 거부를 기피하는 것을 ‘불가피한 패배 시 도덕적 승리’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통 호소 거부는 스캐리의 공리와 관련된 고착화된 우려를 바탕으로 한다. 자기 고통을 포함한 모든 고통이 행동이라면 어떨까? 이러한 방식으로 보았을 때, 타인의 불평과 호소를 죄책감을 덜 요소라는 회의적인 견해를 지니게 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믿는다면, 고통을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거나 비난을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서부터 인종차별을 다루는 방법 관련 논쟁을 살펴볼 수 있다. 극우 세력의 불평 사례 연구 결과, 비판적 인종 이론을 배운 백인 아이일수록 다른 인종이 겪는 고통에 더 큰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미국인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는 이례적인 요청을 하자 많은 이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거부했다. 스캐리의 공리와 달리 의심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의심을 키워가면서 다른 이의 고통 수준으로 의심의 범위를 넓힌다.

모두가 타인의 고통을 실제보다 심각하지 않은 문제로 치부하면서 자신과 동료의 고통은 강조한다.

고통 표현이나 인정을 중단하는 것이 해답임이 분명하다. 불만 표출은 해결책을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고통을 증언하려면, 고통을 호소하는 이의 말을 믿어야 한다. 만성 질환을 겪는 오루케도 의심받을 때의 극심한 외로움을 설명한다. 외로움은 상대방이 고통 호소 증언 조작을 의심하면서 고통에 대한 설명 자체를 합리적이거나 흥미롭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 심화된다. 그와 동시에 절망감을 느끼고 자책하게 된다.

“괜찮다”라는 표현 등으로 우려를 무시받은 코로나19 장기 환자는 속임수나 고통에서 벗어나질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 감염 사례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괜찮았던 문제는 없었으며, 이를 인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가 아닌 사려 깊은 행위이다.

** 위 기사는 와이어드US(WIRED.com)에 게재된 것을 와이어드코리아(WIRED.kr)가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 : 고다솔 에디터)

<기사원문>
Why Is It So Hard to Believe In Other People’s 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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