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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희망, 게임으로 본 미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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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희망, 게임으로 본 미래 세상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게임은 인류 문명이 멸망한 이후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를 어떻게 그렸을까?"
‘세계가 대충 멸망하고 난 뒤’라는 유행어는 김성모의 만화 ‘걸푸’에서 멸망한 세계가 왜 망했는지를 한 문장으로 퉁쳐낸 간결함 덕분에 꽤 회자된 바 있다. 이 문장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상황을 묘사하기에 참으로 편리한 도구다.

꾹꾹 틀어막고는 있지만 아직 확실한 치료제도 백신도 없는 코로나19의 확산세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류의 대멸망'이라는 상상에 다가가도록 만드는 힘을 보인다. 만약 정말 코로나19보다 더 위험한 어떤 병원체가 급속하게 전 세계를 휩쓴다면? 그 대멸망 이후를 상상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은 디지털 게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진균류 좀비로 멸망한 세계의 20년 후, ‘라스트 오브 어스’

2013년 플레이스테이션3(PS3)를 통해 첫 선을 보였고 올해 6월에 2편 출시를 예고한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는 인류 멸망의 원인을 병원체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곤충의 사체에 기생하는 진균류인 동충하초의 변종이 등장해 인간을 숙주로 삼아 퍼지기 시작하고, 그 결과 살아있는 사람들이 좀비처럼 변하며 모든 사회 시스템이 붕괴한 뒤 약 20여 년 후의 이야기를 다뤘다.

멸망한 세계는 게임 속에서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 드러난다. 살아남은 이들은 격리구역 안에서 군사집단에 의해 강한 감시 하에 놓인 채 생활하며, 이전 시대의 물건은 구하기 힘든 희귀품이 되었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조엘은 그런 상황을 이용해 격리구역 간의 밀수를 통해 먹고사는 모습을 보인다. 사람의 발길이 끊기면서 덩굴과 수풀이 무성한 폐허로 변한 격리구역 바깥의 과거 대도시들의 풍경은 인류 멸망 이후의 지구가 어떠할 것인가라는 상상에 대한 훌륭하고 세밀한 답변이다.

게임은 질병으로 인한 파멸과 그 구원이 될 항체라는 소재를 통해 최종적으로는 고전적인 가족애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족의 구성이라는 주제에 다다른다. 공기처럼 익숙해져버린 많은 것들이 변화한 ‘대충 망한 세계’에서 인간이 살아갈 이유는 변화한 환경에 맞추어 새롭게 재구성된다. 올해 나올 2편은 살아남은 자의 분노를 다룬다는 예고를 띄웠다. 전작에서 몇 년 시간이 흐른 뒤의 세계는 얼마나 복구되었는지, 혹은 얼마나 더 위험천만해졌는지도 관건이다.

 
병원체로 인류의 사회 시스템이 붕괴한 이후 시대를 그린 '라스트 오브 어스'. [사진=SIEK]
병원체로 인류의 사회 시스템이 붕괴한 이후 시대를 그린 '라스트 오브 어스'. [사진=SIEK]

◆기계만이 살아 숨 쉬는 천 년 뒤의 기괴한 미래, ‘호라이즌 제로 던’

‘라스트 오브 어스’가 멸망 후 20년이라는 근미래를 다뤘다면 ‘호라이즌 제로 던’은 아예 멸망 이후 천 년이라는 거대한 시간 이후를 그린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다. 스포일러로 인해 더 이상 말하기 어려운 이유로 멸망한 지구에는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 천년에 걸져 나름 새로운 사회가 건설되었지만, 앞선 시대의 지식은 모두 전승이 끊겨 마치 다시 고대 시대로 돌아간 듯한 배경 속에 ‘호라이즌 제로 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멸망 이후 세계의 묘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로봇에 의한 자동 생산공장이 천년이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작동하면서 만드는 풍경이다. 들판 곳곳에는 야생동물 대신 사람의 손을 벗어난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생산을 지속하는 자동 공장이 쏟아낸 기계 야수들이 활보한다. 80년대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로봇괴수 '조이드'를 떠올리는 이들 기계야수는 게임에서 때로는 강대한 보스로, 때로는 사냥을 통해 자원과 재료를 충당하는 몹으로 등장하며 인류의 공백에 펼쳐진 기계들의 세상을 흥미롭게 그려낸다.

천년 뒤의 미래이면서도 오히려 천년 전의 과거로 회귀한 듯한 독특한 패러독스는 호라이즌 제로 던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가 보여주는 기묘함을 SF와 판타지의 경계에 놓는다. 오늘날의 AR 글래스나 블루투스 인이어 같은 장비를 유물로 주워 사용하면서도 그 기능을 기술이 아니라 일종의 마법으로 다루는,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는 아서 클라크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인류 문명이 멸망한 후 1000년이 지나 고대로 돌아가버린 '호라이즌 제로 던'. [사진=SIEK]
인류 문명이 멸망한 후 1000년이 지나 고대로 돌아가버린 '호라이즌 제로 던'. [사진=SIEK]

◆고립으로 나타난 아포칼립스와 연결을 통한 극복, ‘데스 스트랜딩’

가장 최근작인 ‘데스 스트랜딩’은 기존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물과 사뭇 다른 멸망의 원인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세계에 내리기 시작한 '타임폴'이라는 비는 빗방울을 맞는 모든 사물들의 시간을 빨리 가게 만든다. 이 때문에 도로와 통신선을 포함한 모든 것이 쉽게 부식되면서 세계는 전례 없는 연결의 붕괴를 맞이한다.

도로와 철도가 끊겨 물류가 잠기고 통신이 끊어지면서 모든 정보가 고립되는 상황 속에 타임폴을 뚫고 정보와 유통을 다시금 연결시키고자 하는 주인공 샘의 이야기는 꽤 흥미롭다. 고도화된 정보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상황이 단지 질병이나 전쟁, 자연재해 같은 고전적인 이유뿐 아니라 '네트워크의 붕괴'라는 원인으로부터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임 속에서 타임폴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각자의 거주지에서 고립된 채 살아간다는 점에서 데스 스트랜딩은 코로나19로 인해 자발적 격리에 들어간 지금 시기와 비교되며 묘한 예언과도 같은 게임이 되었다. 고립된 개인과 개인 사이를 이어주는 메신저이자 배달부로 뛰어다니는 샘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폭증한 온라인 유통으로 뛰어다니는 수많은 배달업 노동자들의 삶으로도 읽힌다.

 
고립된 인류 사회를 다시 연결하는 내용을 그린 '데스 스트랜딩'. [사진=SIEK]
고립된 인류 사회를 다시 연결하는 내용을 그린 '데스 스트랜딩'. [사진=SIEK]

◆극복할 것임을 알기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테이블 롤플레잉 게임(TRPG)을 위한 룰북인 '누메네라'는 플레이어가 위치한 세계를 설명하면서 이미 이 세계가 여러 차례 멸망 이후 새로 세워졌음을 강조한다. 이전에 있던 세계 중 몇몇은 나노공학의 정수를 다룰 수 있었고 어떤 문명은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 혹은 종족의 문명이었으며 적어도 하나의 문명은 은하계 전체를 아우르는 우주제국의 수도였다는 식이다.

수많은 세계의 멸망과 탄생 사이사이의 어딘가에는 아마도 여러 개의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있었을 것이다. 멸망에 대한 공포가 만든 상상은 게임에서는 적어도 근근이 살아가는 수준의 희망은 유지하는 편이다. "모두가 멸망하고 끝났다"는 식의 결말은 개개인이 자신의 죽음을 '무'로 상상하는 것만큼 끝없는 허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누메네라’ 식으로 멸망과 재생의 연속을 생각한다고 해도 사실 개인이 살아남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인류는 살아남는다와 같은 연대의식 속에 상상 속 드라마는 안도감에 결말을 맺곤 한다.

코로나19로 이래저래 외로워진 사람들의 상상도 결코 파멸의 미래를 향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라던 어느 영화의 말처럼 위기의 순간마다 멸망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를 위기라고 부를 수 있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가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 사태 또한 극복할 것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와이어드 코리아=Wired Staff Reporter wiredkorea@wired.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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